[문학 작품 사진] 저를 위한 향연, 박서영(5506611)
  • 작성일 2022.01.09
  • 작성자 박서영
  • 조회수 155

 

- 정유정, 완전한 행복, 은행나무, 2021

 

작품명

저를 위한 향연

 

선정 이유

작품 전반에 자리한 불온함에 대해 논한다. 낯선 공간과 핵심 이미지. 도시와 달리 습지는 낯선 것이다. 질척이는 밀도와 정의할 수 없는 알갱이들의 조합. 흐릿한 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물끄러미 저마다의 크기로 생성된 웅덩이를 향하여 시선을 옮긴다. 간간이 지상의 표면 위로 호흡의 흔적을 마주한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이었다. 찰박이는 소리와 함께 생명체가 나타난다. 오리였다. 검붉은 빛깔의 두 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것의 정돈되지 않은 깃은 늪과 같은 색을 지니고 있었다. 살갗에 박힌 듯 위치한 눈동자에 시선이 얽힌다. 먹이를 찾아 길쭉하게 뻗은 목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난다. 검은 주둥이를 달싹이며, 힘껏 벌어진 세 치 혀 뒤로 붉은 목구멍이 수축한다. 제법 큰 몸체에 나는 몸을 뒤틀 듯 바르작거린다. 낯선 곳이다. 나는 이 공간이 불편하다. 소란스러운 도시와 달리 적막감이 가득했다.

습지는 낯선 이미지를 부여하며, 핵심과도 같은 매개체의 부재를 상징한다. 이 공간이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았을 때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낯설다는 어원이 주는 심리적 공포감 따위의 것을 말이다. 오리. 그녀의 온전한 행복을 위하여 도구의 역할을 행한다. 나를 향하여 검은 주둥이를 달싹이는 그것은 괴리감을 느껴지게 만든다. 동화 속 오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붉은 살점을 짓이기듯 시야를 채우는 빛깔은 절로 작품 속 그녀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녀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지유는 만드는 법을 잘 안다. 먼저 돼지고기를 사야 한다. 붉은 살점을 빠르게 토막 내고, 바르고, 뜬다. 공기를 타고서 되강오리의 울음소리가 멀리 나아간다. 먹이를 줄 시간이다. 작품의 주 서술자인 지유의 시선을 빌리자면 제3의 공간을 떠오르게 한다. 늪은 발목을 옭아매는 진흙 펄과 깊은 골짜기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밥터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수레를 들어 올려 먹이를 부어버린다. 한 되 뒤섞인 살점이 미끄러지듯 떨어진다. 곧 오리들이 머리를 내밀 것이다. 밥터의 모양새는 넓적하며 미끄럼틀과 같이 비스듬하다. 이러한 것은 언젠가 보았던 고대 잉카 제국의 건축 양식이 떠오른다. 재단. 제사를 지내며 풍요, 안전, 행복 따위의 것을 염원하던 장소. 오늘날 그녀는 이를 닮은 장소에서 고깃덩이를 굴린다.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무엇이 되었듯, 온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탓에 밀려진 붉은 살점은 짓이겨질 터다. 저를 위한 향연이었다.


감상문

사람은 저마다 비밀을 가진다. 그렇기에 이들은 믿을 수 없는 서술자다. 보통의 경우 주인공은 충직한 서술자의 역할을 행한다. 그러나 본 작품의 서술자는 그녀가 아니다. 즉 사건의 핵심이라 일컫는 인물이 침묵을 택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녀를 대신하여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물들을 서술자로 내세운다. 서지유, 서재인, 차은호. 이들은 가족이다. 불행하게도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는 강력한 불가항력의 집합체에 속한다. 다만 그들은 선택하지 못했다. 아이는 모든 것을 목격한다. 창고에서 아빠의 소지품을 발견하고, 모두가 잠든 밤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작가는 유일한 목격자를 최약체인 아이로 설정한 것이다. 이 외에도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가 존재한다. 그는 살인 혐의를 벗어야 했다. 하지만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 후였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이지만, 정작 본인은 무엇도 단언할 수 없다. 이렇듯 아이러니는 인물을 포함한 작품 전반에 눅진히 녹아있다. 이러한 설정은 인간이기에 존재하는 한계다. 학습된 공포, 불안, 트라우마와 같은 요소들은 인물의 이성적 사고를 방해한다. 작가는 인간의 한계를 개인의 약점으로 설정한 것이다. 결국 트라우마를 직면한 인물은 사지를 뒤틀듯 숨을 헐떡인다. 밀려오는 공포에 숨을 멈추기도 잠시 의심이 피어오른다. 혹 한계가 만들어낸 거짓된 기억은 아닌가. 불행히도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서술자였다.

노아가 죽었다. 낯선 이들의 구둣발 아래 번쩍이는 대리석 바닥이 짓눌린다.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며칠 후, 그가 집에 돌아왔다. 말끔한 부엌, 얼룩 하나 없는 거실의 대리석 바닥, 불이 꺼진 멀티탭, 각이 잡혀 세워진 대형쿠션 두 개……. 시선은 뚜렷한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정처 없이 이동한다. 물끄러미 이어지는 텍스트의 나열을 보았다. 마침내 기나긴 문장의 마침표가 찍힌다. 평온하다. 집안의 풍경은 살갗에 소름이 돋도록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이는 볕이 내리쬐는 일요일 늦은 오후를 닮아있다. 기이한 고요가 밀려온다. 이곳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창백한 낯빛의 그 하나였다. 이곳은 그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문득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불편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늘 그는 의문을 던지고, 그녀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잦은 거짓말, 길게 이어지는 칼자국, 낯선 원색의 찻잔.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함을 유발하는 것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한 실수라 생각했다. 우연과 착각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7장을 지났을 무렵이었다. 결국 노아가 죽었다. 노아를 죽인 것은 우리였다.

무분별한 시간의 가업. 누구도 희망하지 않은 승계. 과거 그녀의 어머니는 신부전 말기 진단을 받았다. 부신에 자리한 종양이 원인이었다. 작은 종양은 사람을 좀 먹었다. 관계를 단절하고, 체중이 줄어들다 끝내 우울증을 마주한다. 어느덧 껍데기만 남은 허상이 허무가 되었다. 8살의 재인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법, 무안을 당해도 울지 않는 법, 집에서 살기 위한 생존방식까지. 재인의 규칙은 지유의 행동과 닮아있다. 크게 변화한 것은 없다. 그저 주체와 대상이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흡사 가업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그들의 집안이 이룩한 불행한 업적의 세습이었다. 훗날의 재인의 삶은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녀를 좀 먹는 이들은 여전히 저의 목숨을 앞세워 책임을 전가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긍정의 답을 내놓는다. 또다시 불안을 외면하는 것이다. 허탈함을 일으킨다. 흔히 기대하는 행복한 결말은 없다. 작가는 희망적인 소설적 자유를 용납하지 않은 셈이다. 이는 적나라한 현실의 모습을 닮아있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분명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괜찮아, 우연이었어. 어쩌면 오늘도 또 다른 재인이 만들어지고 있을지 모른다. 저마다의 시간이 만들어낸 가업이었다.

 

완전한 행복에 대하여. 완전한,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무심하며 동시에 잔혹하다. 이는 명확한 기준이 없음을 명시하는 것이다. 본래 행복은 단순한 개인의 영역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역시 행복의 정의를 거론한다.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 그가 정의하는 행복이다. 인간은 이 모호한 존재를 열망하며, 몸을 내던지는 것이다. 신유나. 그녀의 완전함은 뺄셈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셈은‘0’이 되었다. 숫자 ‘0’은 마침표와 닮아있다. 본래 마침표는 문장의 끝맺음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에 숫자 ‘0’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든 ‘1’이 될 수 있다. 그녀가 완성한 ‘0’이 과연 완전한 존재일까. 결국 그녀는 죽음으로도 완전한 ‘0’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